
📰 101세로 별세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前 총리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의 주역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가 향년 101세로 별세했습니다.
오이타현 자택에서 노환으로 눈을 감은 그는 1994년 6월부터 1996년 1월까지 총리를 지내며 199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에 맞춰 역사적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 무라야마 담화, 무엇이 달랐습니까?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총리 공식 문서 가운데 처음으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명시하고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를 선언했습니다.
“1995년 일본은 과거 한때 국가 정책을 그르쳐 전쟁의 참화를 초래했고,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 국민에게 커다란 손해와 고통을 안겼습니다.” – 무라야마 담화 중에서
당시 일본 내 보수 진영은 거센 반발을, 한국·중국·동남아 국가들은 조심스러운 환영을 표했습니다.
🔍 국내외 반응이 엇갈린 이유
일본 사회당 출신이던 그는 자민당·신당사키가케와의 연립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정치 기반이 약했지만 도덕적 리더십으로 승부했습니다.
그러나 담화 직후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쟁이 이어졌고, 보수 우익은 “자학사관”이라며 공격했습니다.
💬 한국 사회가 보는 ‘무라야마 담화’의 의미
과거사 검증위원회에 참여했던 국내 학자들은 “일본 최고 권력자의 공식 사죄는 한일 관계의 대화 기준점을 세웠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무라야마 담화 문구를 재인용하며 양국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 일본 정치권의 현재 입장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원칙을 반복하면서도, 표현 수위는 다소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무라야마 담화 계승 여부가 일본 외교 신뢰도의 핵심 변수”라고 분석합니다.
📊 담화 이후 수교 60년, 한일 관계 성적표
문화·경제 교류는 급팽창했으나 역사 문제 갈등 지수는 여전히 높음(2024년 외교부 조사)입니다.
K-콘텐츠 붐과 일본 관광 재개가 교차하며 ‘디커플링과 리커플링’이 동시에 진행 중입니다.
🧭 무라야마가 남긴 과제
첫째, 전쟁 책임 교육의 제도화입니다. 둘째, 법적 배상과 인도적 지원의 구체화입니다.
셋째, 내년 오사카 엑스포를 계기로 미래지향적 공동선언 2.0을 추진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 무라야마의 생애와 소탈한 행보
1924년 오이타현 어촌 출생, 선거 때마다 지역 사투리 연설로 ‘서민 총리’라 불렸습니다.
퇴임 후에도 고향 재해 복구·평화헌법 수호 운동에 앞장서며 소탈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 전문가 시각 – 계승과 비판 사이
도쿄대 하라구치 교수는 “이제는 담화 정신을 넘어선 실천이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반면 우익 논객 사쿠라이 요시코는 “무라야마 담화는 과도한 굴종”이라며 철회 요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세계적 파장과 ‘사죄 외교’의 미래
독일의 브란트 총리 ‘바르샤바 무릎 꿇기’ 사례와 함께 국가 사죄 외교의 대표적 모델로 연구됩니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전후 평화 구축 보고서에서 ‘무라야마 담화’를 ‘동아시아 화해의 분수령’으로 평가했습니다.
🔮 향후 전망
무라야마의 별세로 담화 30주년 준비 위원회는 추모‧계승 세션을 신설했습니다.
한일 젊은 세대가 역사·문화 공동 워크숍을 통해 ‘기억의 외교’를 실험할 예정입니다.
✍️ 기자 메모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낡은 교과서의 문장 하나를 행동으로 바꾼 정치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과거와 미래를 잇는 다리’가 되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라이브이슈KR은 앞으로도 무라야마 담화 후속 논의와 한일 관계 변화watch를 꾸준히 추적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