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제10대 국왕 연산군을 둘러싼 관심이 최근 드라마·웹툰 ‘폭군의 셰프’ 흥행과 함께 다시 고조되고 있습니다. 작품 속 화려한 연회와 대비되는 실제 국정 운영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봅니다. 🍽️
연산군은 성종과 윤씨(폐비 윤씨)의 적장자로 1494년 즉위했습니다. 즉위 초기에는 정치를 맡았던 성종의 유훈 세력이 건재해 비교적 안정적인 국정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붕당 간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이어졌습니다.
무오사화의 발단은 성종 치적을 비판한 사관들의 사초였고, 이는 곧 사초 열람 금지를 어긴 신진 사류 탄압으로 번졌습니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사서(史書)를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갑자사화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연산군이 분노해 대신·학자를 대거 처형한 사건입니다.
“어버이를 위하는 자는 은휘를 삼간다.” – 『춘추』 인용 구절
라고 하지만, 실제 조치는 피의 복수였습니다.
연산군은 궁궐 내 ‘연회(燕會)’를 의미하는 연산(宴山)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설처럼 연회를 즐겼습니다. 잦은 사냥, 거액 비용의 향악 연습, 궁중 연희는 백성의 부담으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궁중 가무단을 확대해 ‘내연청(內燕廳)’을 만들고, 후궁 장녹수를 앞세워 사치를 극대화했습니다. 장녹수는 노비 출신이었으나 노래·춤 실력으로 국왕의 총애를 얻었습니다. 🎶
수취 체계도 가혹해져 ‘파자세(破字稅)’·‘수결세(手結稅)’ 같은 부담스러운 잡세가 늘어났습니다. 백성들은 “왕보다 사신이 상석에 앉았다”는 소문처럼, 질서가 무너진 국정을 체감했습니다.
결국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습니다. 연산군은 ‘왕(王)’ 호칭을 박탈당하고 ‘군(君)’으로 강등돼 강화도로 유배됐으며, 31세에 생을 마쳤습니다.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연산군 추정 어진’ (공공 도메인)
학계에서는 연산군을 ‘폭군’과 ‘희생자’라는 두 시각으로 나눠 분석합니다. 폭정은 사실이지만, 사림 세력의 정치적 명분이 과장됐다는 의견도 제기됩니다.
최근 tvN 토일드라마 ‘폭군의 셰프’(원작: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가 “사신과 나란히 앉은 왕” 묘사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원작자는 SNS를 통해 “실록·사고 자료를 기반으로 한 재현”이라며 반박했습니다.
※문화재청 관계자
는 “명나라 사신 접견례는 시기·위치에 따라 의전이 달랐으므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연산군 시대 의례·외교 연구의 공백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반정 당일 중종이 즉위한 창덕궁 인정전 (사진: Wikimedia, CC BY-SA)
역사 기행을 원한다면 창덕궁 인정전, 강화도 연산군 묘터(강화군 길상면) 등을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현장에는 QR 가이드가 준비돼 있어 모바일 해설도 지원합니다. 📱
읽을거리로는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박영규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연산군』, 그리고 최근 발간된 ‘연산군 다시 읽기’ 학술총서를 추천합니다.
결국 연산군은 ‘사람’과 ‘제도’가 충돌한 비극적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권력의 속성, 기록의 힘, 그리고 역사 해석의 복합성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